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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기] 두갈래의 길

ch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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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재미교포인 조승희 사건, 제주도 어린이 성폭력 유괴 살인 사건 등 세간에 떠오르는 폭력의 흉흉한 이야기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 중에 저는 며칠 전 신문의 조금만 귀퉁이에서 여섯 살 아이의 죽음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대소변 못 가려 6살 의붓딸 때려 숨지게”란 기사제목이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대소변을 못 가린다며 가슴과 배를 마구 때린, 계모에게 학대받던 아이가 매 맞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부검결과 아이의 갈비뼈가 8대나 부러져 있었고 발목과 손목에 골절 흔적과 눈가와 온 몸에 심한 멍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퍼런 멍자국이 완연한 채, 매 맞으며 죽어간 어린아이의 영혼…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매 맞으며 죽어간 그 아이의 죽음도 죽음이었지만, 계모인 여인의 삶에 깊은 마음이 갔습니다. 그녀의 삶은 어떠한 인생행로를 밟아 온 삶이었을까?
얼굴도 이름도 전혀 모르는, 한번도 그 여인을 만나 사연을 들은 적은 없지만 아마 그 여인은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살았던, 거절감으로 그 인생이 제대로 된 사랑한번 받아보지 못한, 많은 상처를 받은 여인이었을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때려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주위의 자신의 상처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적대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과 가정과 이웃과 사회에 마구 독화살을 쏟아대고 있을 제2의, 그리고 제 3의 무수한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슴 속에 서리서리 쌓인 한을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풀어 버렸던 어머니의 아픔과 회한의 감정들은 나에게 전이되어 나 또한 신경질과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일 속으로 도망치는 어머니와 얼음 덩어리 같이 찬 아버지 사이에서 항상 소외되고 돌봄을 받지 못했던 내 안에 가득한 짜증과 욕구불만의 덩어리는 어디 풀 데가 없어서 좀 만만하다 싶은 상대에게 터져나갔습니다. 바쁜 농번기에 집안 일을 거들어주고 품삯으로 먹을 것을 받아가는 우리 집에 일하러 온 아낙네들을 향해 대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기도 했습니다. “나가, 오지 말어, 얻어먹으러 오지말란 말이여.” 어린 것이 긴 작대기로 그네들을 후려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 집에 자주 일하러 오던 아주머니의 아들인 삼식이란 놈을 항아리에 밀어 놓고 뚜껑을 닫아버리기도 했습니다. 공포에 질려 발버둥치면서 꺼내달라고 울던 그것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잔인함이란…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을까,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지금 구부러진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까 싶은 생각에 내 가슴이 화로에 데인 듯 싶습니다.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우리 집안의 슬픔과 아픔이 나에게 전이되어 나 또한 작은 일에도 부르르 떨며 그 누군가에게 가슴에 화인을 새긴 듯 상처를 준 것이 어디 이 일들뿐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를 입은 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처의 가해자와 폭력자로 그 위치를 탈바꿈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악순환입니다.
폭력의 배후
이렇듯 어떤 폭력이든 간에 폭력을 행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배후에는 마음의 상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한 권력의 폭력자 히틀러 역시 성장과정의 상처가 그렇게 처참한 폭력을 발생시킨 뿌리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계속 품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폭력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마음의 상처는 가정폭력에서 싹틉니다. 첫째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서로 간에 주고받는 신체적인 폭력이나 언어적인 폭력이오, 또는 힘을 가진 부모가 자녀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런 폭력 속에 자라는 아이는 성장한 후에 똑같은 폭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많은 연구 보고서가 폭력의 대물림 현상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폭력은 유산처럼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폭력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을 양산하는 온상입니다. 가정에서 양성된 폭력 가능자가 교회로 가면 교회폭력집단을 만들고 정계로 가면 정치 폭력자가 되며, 학교로 가면 학교폭력 당사자가 됩니다. 그렇기에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사회를, 국가를 위기로 몰아가는 폭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폭력은 암과 같습니다. 암은 세포의 일부분이면서 한 생명 전체를 죽입니다. 우리 사회에 암처럼 퍼져가고 있는 가정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 치유방법으로 손쉽게, 상처입은 과거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꾸는 능력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면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불행한 기억을 싹둑 잘라버리면 좋을텐데 그렇게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상처는 더욱 더 우리의 무의식 속에 또렷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저지른 부당한 잘못들을 없었던 일로 치부할 수도 없고 우리의 기억에서 지울 수도 없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마치 두 갈래의 길을 내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 길은 어쩌면 예수님이 말씀한 좁은 문과 넓은 문에 대한 비유와 같습니다. 그것은 별 노력없이도 아무나 갈 수 있는 넓은 길과 수고하며 애쓰며 나아가야 되는 좁은 길로, 저는 그 넓은 길을 상처입은 가해자가 되는 길로, 그리고 좁은 길은 상처입은 치유자의 길로 부르고 싶습니다.

상처입은 우리들에게는 두 갈래의 길, 곧 상처입은 가해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것인가 하는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 속에서 몸에 배어버린 행동양식인 우리의 혈기, 분노와 성냄으로 상처입어 으르렁거리는 가해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험한 아픔은 많았지만 그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사용되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 또한 제 삶의 상처와 아픔, 연약함을 재산으로 지금은 치유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가슴 아련함이, 약자로서의 이리저리 짓밟힌 삶이 없었다면 어찌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기도 한, 자식을 잃은 여인이 집집마다 눈물 없는 집을 구하다가 결국 한 집도 못 발견하고 돌아왔다는 것처럼 우리의 죄된 인생은 어느 누구나 나름대로의 상처와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다. 저희 치유상담연구원에서 공부를 하는 분 중에서 어떤 분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속의 풀리지 않은 숙제같은 심한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5세 때 성폭력을 당해 그때의 수치심과 두려움, 열등감이 시작되었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게 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치유받고 나니 주위의 상처입어 쓰러져 있는 많은 이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상처받은 이웃들을 도와가며 살겠습니다.”
각각의 아픔의 내용이야 각 사람마다 다르지만 비단 이 분의 고백이 이분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 2의 제3의, 이어지는 고백임을 저는 너무나 많이 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그리고 그것이 치유받으면 이제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처입어 쓰러져 있는 많은 이웃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쓰러져 있는 이웃들에게 힘을 주며 격려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에 인생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도 우리의 상처와 연약함이 힘입니다를 외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제2의 제3의 상처입은 치유자들의 행렬이 이어질 것을 알기에 이 세상의 어둠에 대해 낙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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